구름에 가려져 어스름한 그믐달빛이 흘러내리는 숲 어귀, 담청은 그 고요를 깨뜨리며 달리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영 거슬렸다. 체내에서 돌고 있는 독 탓이다. 담청은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고 감각이 둔해진다. 이대로는 오래 달리지 못할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달려도 흔들리는 시야를 어찌할 수는 없다. 끝끝내 담청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그러면 흑의를 입은 무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담청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자신을 양지에 드러낸 사파의 문주는 결국 제 목숨을 노리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끝인가, 하고 담청이 스스로를 조소할 때쯤이었다.
돌연 불길을 닮은 검기가 숲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내 웬 무인이 눈앞에 나타난다. 담청은 흐려지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을 노리는 살수들은 전부 숨이 붙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담청이 미심쩍은 눈으로 조금 전 나타난 무인을 보면, 붉은 머리에 화려하게 생긴 소공자가 담청을 향해 손을 내민다.
"괜찮은가?"
담청은 그 손을 잡아도 괜찮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상대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담청이 손을 잡을 기미가 없자 소공자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담청의 몸을 바로 눕히고는 맥을 짚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사파의 내공이군."
일순 오싹함을 느낀 담청이 소공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손에 강기를 두른 채로 담청을 내려다보고 있다. 담청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젠가 협명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은 했으나, 조금 전까지 저가 사파인 것도 모르던 이가 대뜸 강기를 들이밀면 기가 막힌 법이다. 고통에 미간을 찡그린 담청이 공자를 노려보며 말한다.
"⋯죽일, 건가?"
"음? 아니네. 그저 폐공을⋯."
"그게 죽으란 거잖아."
담청이 두어 번 기침을 토하면 소매로 가린 입가에서 객혈이 울컥 튄다. 독을 얼마나 쑤셔 박아진 건지 소매를 물들인 혈액의 색이 거의 시커멓다.
"확실히 몸이 이래서야⋯ 내공을 폐했다간 죽겠군."
붉은 머리의 공자는 해사한 낯 그대로 담청의 혈자리를 짚어 내공과 움직임을 봉했다. 담청은 헛숨을 삼키곤 고통스러운 눈으로 공자를 노려본다. 결사의 발악을 해 볼 기회조차 어이없게 빼앗겨버린 담청은 이제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담청은 저 도련님이 대체 뭘 원하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내 공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헛소리였다.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갱생할 기회를 줄 테니 남궁세가 식솔로 들어와 일해보는 것은 어떤가!"
남궁가였나⋯. 그곳 소가주가 제법 해맑은 인간이라고 들었는데, 보아하니 이놈이 그놈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담청이다. 그러다가 시야가 빙글 돌아가면 담청은 깨질 듯한 두통을 애써 무시하며 무슨 일인가 재차 주변을 살핀다. 그러면 담청은 이 기이한 공자가 자신을 번쩍 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 이거 놔⋯!"
"진정하게. 의원에게 가는 것뿐이야."
담청은 이제 슬슬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할 기운이 없었다. 담청은 그저 반사적으로 날을 세울 뿐이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사파보단 믿음직하지 않은가?"
이제 담청은 입을 꾹 다문다.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고 저항이 통할 것 같지도 않다. 담청은 일단 얌전히 굴어 주기로 한다.
긴장감 때문인지, 담청은 호송 당하는 내내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것을 어찌어찌 버텨낸 것에 가깝지만. 미숙한 사파 문주는 남궁 소가주의 품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할지와 자신이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계산한다. 사파의 생리에는 빠삭하지만 정파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는 담청이다.
세습世襲
의약당은 발칵 뒤집힌다. 소가주가 웬 독에 절은 산송장을 데려와 살려 놓으라는데, 아무래도 사파의 무인인 것 같으니⋯.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모를 일이라며 의원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한다. 소가주는 치료하는 양을 쭉 지켜 볼 심산인지 평상에 정좌로 앉는다.
이윽고 의원이 소가주에게 이른다. "중독 증세가 심한데⋯." 소가주는 예상했던 바라며 납득한다. 척 보기에도 흘리는 피가 죄 시커멨으니. 하지만 이어지는 의원의 말은 소가주를 기함하게 한다.
"아편?"
의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하루 이틀 쌓인 양이 아니라는 듯하다. 어쩐지, 내공을 봉했을 때부터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더라니, 내공으로 중독 증세를 억제해야 하는 이유가 살수의 독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궁 소가주는 담청에게 저벅저벅 다가가 그를 일으켜 앉히곤 곧바로 그의 뒤에 앉아서 도인을 시작한다. 담청은 당황한다. 이 몸에 정순한 내공 따위가 들어왔다간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상대도 모르지 않을 터다. 고문을 할 거면 더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소가주는 냅다 내공을 밀어 넣는다. 시커먼 기운이 덕지덕지 엉겨붙어 있는 사파인의 육체에 맑은 내공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담청은 상체를 숙이고 울컥 올라오는 죽은 피를 연신 뱉어낸다. 와중에 움직임을 봉하던 점혈이 풀린 것인지, 담청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긁는다.
"미⋯친, 풀어! 그만, 하라고! ⋯커헉, 윽⋯."
소가주는 정말, 굉장히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담청을 독려한다. "조금만 더 참게. 거의 다 됐어." 담청은 그 선의에서 공포를 느꼈다. 담청은 생각한다. 이 새끼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게 한참을 더 시달린 담청은 몇 번이나 혼절했다가 깨어났다. 어느새 바닥은 검은 핏물로 흥건하다.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연신 질러 대던 담청은 이제 진이 다 빠져 널브러져 있다. 색색거리며 소가주를 노려보는 담청에게, 소가주는 약초 달인 물과 요상단을 내민다. 담청은 그것을 거절한다. 소가주는 아쉽다는 듯 상을 물린다. 담청은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럼, 나는 남궁단이네. 자네는 누군가?"
자신의 신분을 떳떳이 밝히는 것은 정파 세가의 귀공자이니 그런가 보다 하겠으나, 이제 와서야 신분을 묻는 안일함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리고⋯.
"말해주면 믿으려고."
애초 말한다고 믿을 것 같지가 않다. 저 같은 애송이가 하오문주라고 말한들 그걸 누가 믿겠는가. 믿어만 준다면 지금부터 남궁과 무엇을 거래하든 자신의 신분이 보증이 되어 주겠지만, 담청은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암울한 계산을 머릿속으로 마치면, 단은 무구한 낯으로 웃으며 물어온다.
"거짓말을 할 텐가?"
감히 거짓을 고하겠는가-라는 질타보다는, 진짜 거짓말을 할 건지 궁금해서 묻는 것으로만 보인다. 담청은 그것이 거짓으로 꾸며 낸 순수함인지 간파해 낼 도리가 없다. 담청은 더이상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싶은 마음에, 그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럼 말해주게. 자넨 누군가?"
담청은 잠시 침묵한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이 이름이 무겁다고 생각할 뿐이다. 저는 아직 미숙한데, 집안 어른들처럼 강하지 못한데 이 자리를 책임지는 것이 과연 맞나 싶었다. 담청은 이 자리가 버겁기만 했다. 그래도⋯.
"⋯광동제가, 하오문주 제담청."
이 이름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것은 없나?"
오늘도 단은 아침부터 식사와 함께 찾아왔다. 담청이 하오문주임을 밝힌 후로도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믿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지. 담청은 모를 일이다. 담청은 그저 오늘도 피로한 낯으로 식사를 거부하며 '필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아편."
"말고."
"몽연."
"말고."
"⋯그럼 없어."
오늘도 무용한 이야기였다.
담청은 단이 돌아가고 나면 장원에 지나다니는 식솔들의 이야기를 습관처럼 수집했다. 그의 독문무공은 주변을 감지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보통 하오문, 특히 제가장이라면 경계하는 것이 맞는데⋯. 이 해맑은 소가주는 그런 것에 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덕분에 담청은 현재 이 집안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을 마쳤다. 소가주는 하오문주의 존재를 가주에게 보고했고,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가주와 보좌관은 뒷목을 잡았다. 아마 이제 남궁세가는 하오문주의 처우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질 것이다. 사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세력의 장이니,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유용한 패가 될 수도, 치명적인 악수가 될 수도⋯.
다만 소가주 남궁단은,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담청은 어느새 이곳에 적응해 있었다. 한동안은 처소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앉아서나마 선잠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쨌든 남궁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일 것 같지도 않으니, 억지로 붙잡혔다는 변명 하에 간만에 평화롭게 쉴 심산인 담청이다. 평화의 기준이 많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있다. 협박을 하든, 회유를 하든, 원하는 걸 제시하면 대충 그에 맞춰주고 돌아갈 심산이었으나⋯ 이들은 치료를 해 줘놓고는 요구하는 게 없다. 그리고 애초에 담청의 몸은 이미 망가져 있으니 이런 치료에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남궁 소가주는 틈만 나면 약을 달여 내미는 것이다.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헛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담청은 그것이 거슬렸다. 빚을 지워 놓으려는 건가? 결국 담청은 단에게 직접 묻는다.
"대체, 바라는 게 뭐지."
"흐음⋯ 그냥 자네가 올바른 삶을 살길 바라네."
의외의 대답에 담청은 미간을 모으고는 그저 침묵한다.
"여튼, 그리 되었으면 했는데. 하하. 어쩌다 보니 납치한 게 되어버렸군. 미안하네!"
담청은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는 게 싫은 탓이다. 마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은 처음부터 떳떳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고, 담청은 생각한다. 사도邪道, 삿된 길, 그 위에 있으면 올바른 삶이 아닌 것인가. 아. 담청은 이제 생각을 그만하고 싶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뱉는다.
"⋯미안한 거 알면 풀어주지?"
"그렇게 돌아가고 싶나?"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담청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돌아가고 싶냐고? 그곳으로? 흔들리는 담청의 눈동자를 단은 목격하고야 만다. 단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담청은 그 말을 막아버린다.
"⋯그런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리 없잖아."
"자네⋯."
그리곤 담청은 단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축객령을 내린다.
"가. 날 존중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은 돌아가."
하오문주가 부재한 강호의 사도는 기이한 형색으로 흘러간다. 흑도문파의 느슨한 연합인 하오문은 문주가 없는 동안에도 다른 결정권자들에 의해 큰 말썽 없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파에 몸담은 이들은 더욱 영악하게 잇속을 챙기기 시작한다. 흑도 문파가 연류된 암시장이나 투기장이 횡행하고, 상단은 밀매에 박차를 가한다. 사파의 영역에는 점점 빈민들이 늘어만 간다.
단발적인 폭력보다 산발적인 폐단이 무서운 법이다. 정파의 칼잡이들-부외자들-이 과연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좀 괜찮나?"
"뭐가."
반나절이 지나 다시 돌아온 단이 대뜸 질문하면, 담청은 시큰둥하게 반문한다.
"조금 전에 힘들어하지 않았나."
계속 캐묻는 것이 잡아 떼려 해도 통할 것 같지가 않다. 담청은 대충 괜찮다는 양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면 단의 표정이 한눈에 보기에도 환해진다. 표정이 저렇게까지 솔직할 수도 있구나, 하고 담청은 속으로 감탄한다. 그러고 있으면,
"자네, 정파로 넘어오게."
"뭐?"
단은 또 뜬금없는 말을 해온다. 담청은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남궁이 뒤를 봐줄 테니 정파로 넘어오게. 원치 않게 흑도에 있는 사람들도 데려오지.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겠네."
단은 손을 내민다. 잡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잡을 수 있다는 손이라고 말하듯, 그의 두 눈에는 결의가 가득하다. 하지만 담청은 선의를 믿지 않는다.
"⋯내가 남궁의 이름을 업고 더러운 짓을 저지르면 어쩌려고."
그리 물으면, 단은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그런 짓을 할 겐가?"
그때와 같다.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같은 질타가 아닌⋯ 상대를 의심해 본 적도 없는 이의 순진한 의문이다. 담청은 이제 그것이 거짓으로 꾸며 낸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담청은 중얼거리듯 반문한다.
"⋯혹시 모르잖아."
"그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싫다고 한 자네를 억지로 끌어들인 내 잘못이고."
단은 호쾌하게 웃는다. 담청은⋯ 이렇게 올곧은 눈은 바라보고 싶지가 않았다. 담청은 그저 멀리 어딘가를 보며 단의 눈을 피한다. 담청은 이제 단이 왜 이런 제안을 해 왔는지 알 것 같아졌다.
"도련님은 순진하시군."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색을 들켰더니, 이 해맑은 양반이 사파의 생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 그른 길인 줄 알고서도 거기에 서있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 설령 일문파의 문주라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저 도련님이 그것을 보기 시작한 모양이나, 다만⋯.
"누군가는 거기에 있어야 해."
대답은 거절이었다.
"곧 떠날 거야. 놓아주지 않으면 도망치겠어."
끝까지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그날 밤, 담청은 바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포로를 일부러 놓아줬다는 말이라도 돌면 아무리 소가주라 해도 문책을 면치 못할 테니, 그가 돌려보내 주겠네 어쩌네 하기 전에 미리 도망쳐버릴 심산이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안다. 사실 이런 어리고 미숙한, 게다가 죽여도 별 뒤탈이 없는 사파의 수괴는 협명을 날리기에 딱 좋은 만만한 사냥감이다. 게다가 남궁은 자신들의 정보를 얼마나 주웠을지 모르는 흑도인을 살려둘 수 없을 것이다. 죽이지 않는다면 목줄을 채우려 하리라. 담청도 그것을 알기에 야음을 틈타 장원을 빠져나가려 한다. 담청은 땅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올라 담벼락을 밟는다.
그러면 그 앞으로 제왕검형의 빛이 땅을 가른다.
하오문주를 잡아라! 하는 외침이 장원을 울린다. 생포할 수 없다면 죽여도 좋다는 가주의 명령이 담청의 무공에 감지된다. 안다. 그도 알고 있다. 이곳은 안전한 적 없었고, 남궁 소가주는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 그럼에도 담청은 멋대로 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온당치 못한 감정이다. 할 수 없는 것을 멋대로 기대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담청은 봉해진 혈도에 기를 억지로 욱여넣어 뚫어낸다. 승산은 적지만,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으면, 돌아가지 못하면⋯⋯.
⋯편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단의 목소리였다. 담청은 단이 이렇게 노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단은 가주와 대치하고 서서, 담청의 퇴로를 열어주듯 그를 등지고 검을 뽑아 든다.
담청은 멍한 눈으로 대치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간을 와락 찡그린다. 그리고는 애꿎은 단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그 자리에서 팟 하고 사라진다.
하오문주가 남궁에 머물렀던 날로부터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하오문의 행보는 사파라도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다만 어째서인지 담청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저를 죽일 이를 끌어들이려는 듯 굴었다. 창천남궁에서도 담청을 잡으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대외비라지만 하오문주인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담청은 마을 어귀의 숲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밤바람이 찼다. 구름에 가려져 어스름한 그믐달빛이 흘러내리는 숲 어귀, 풀벌레 소리만이 약간 들려오는 고요한 자정이다. 꼭 그날 같기도 하다. 독이란 독은 죄다 쑤셔박아져 숲으로 내몰린 날. 그리고 그때 웬 불꽃 같은 소공자가⋯.
그가 눈앞에 있었다.
⋯담청은 의아함보다 피로감이 앞선 낯으로 나직이 중얼거린다.
"죽이러 왔나. 끈질기네."
단은 꼭 상처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당신이? 담청은 기가 차다.
"구하러 왔네."
여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 대는 도련님이다. 누가 누굴. 정파 세가의 소가주가 사파 수괴를 말이지. 담청은 픽 웃는다. 조소보다는 한숨에 가까운 웃음이다.
"⋯말했잖아. 누군가는 여기에 있어야 해."
서늘한 바람이 담청의 목덜미를 간질인다. 그는 그것이 꼭 제 목을 노리고 지척까지 다가온 칼날의 온도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