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解


 

“정당화? 마치 내가 나쁜 일이라도 한다는 듯 구십니다. 내가 지금 핑계를 대는 것으로 보입니까?”
    
블랙은 픽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무감정한 눈길은 에단을 향해있지조차 않았다. 블랙은 에단에게 집중하는 찰나마저 아깝다는 양, 공허한 눈으로 무대의 화려한 조명만을 좇고 있었다. 산발적이던 분노가 삽시간에 식어버린 표정은 서늘하기만 했다. 표정이 꽤나 솔직한 블랙임에도, 지금은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는지 종잡기 어려운 무감한 낯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빛이 창백한 실루엣에 닿아 윤기를 잃고 건조하게 부서졌다.
    
“대체 왜 시비를 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운영되는 ‘거래소’입니다. 감정에 호소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얼핏 냉정한 선언 같기도 했고, 외려 에단을 어르고 달래는 것 같기도 했다. 블랙의 태도는, 자신이 옳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양 여상하기만 했다. 그는 휴먼숍의 팸플릿을 공연히 뒤적거리다가 도로 접어두었다.
    
“당신과 쓸데없는 대화로 기운 빼고 싶지 않습니다.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랬다. 그는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야 당연히, 그는 이 자리가 필요했으니까. 이것이 어떻게 되찾은 자리이던가. 그는 에단과 같을 수 없다. 블랙은 한번 타의에 의해 추락해 진창에 처박힌 인물이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다를 수밖에.
어떻게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 돌아왔는데. 무엇을 위해서!
    
그러던 와중이었다.
난 자네가 그들과 똑같아지기를 바라지 않아─ 라는 말.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쥐고 있던 팸플릿을 우드득 구겼다. 구김살이 자글자글 잡혀 처참하게 으스러진 단단한 인쇄지가 손 아래로 툭 떨어졌다. 돌연 표정을 구기는 것이 그때 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어떤 시점에, 에단의 의도와 다르게 우연히 자기혐오의 어떤 지점을 속절없이 꿰뚫렸을 때 뿜어져 나오던 발작적인 분노. 제멋대로 문장을 분해해 곡해해버리는 그 비틀림이 또 스스로를 상처입혔을 때. 그때의 자멸적인 블랙.
    
“…이미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질 생각도 없습니다. …왜 날 그런 표정으로 봅니까.”
    
잠시간의 침묵 후 나지막한 욕설이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권태, 염증, 진저리. 낯에 그런 것들이 스쳤다.
비스듬히 귀빈석의 소파에 몸을 기댄 블랙의 표정이 좋지 않자 아랫것 들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주변의 인간들은 미약한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법도 했다. 블랙은 원체도 성격이 나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동격자로서 존중할 필요가 없는 이들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눈에 선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