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상 복무 인정 심의 통과 기록


해군본부 법무실은 언제나 조용한 편이다. 서류를 넘기는 소리, 펜촉이 종이를 긋는 마찰음, 가끔 들려오는 장교들의 나직한 대화를 제외하면 늘상 이런 적막에 가깝다. 유별나게 이곳이 조용한 이유는, 법무실장인 아실릭 소령이 소음에 지독히 민감한 성격파탄자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조리하게도 다른 근무자들이 이 새파랗게 어린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사는 것, 그게 이곳 법무과의 현주소다.

 

그리고, 동료들의 숨통을 틀어막은 아실릭 소령── 아실릭 데미안 블랙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류를 검토하고, 퇴짜를 놓고, 또 다른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군법무관이라는 직책이 대개 그렇다. 글자 많고 탈 많은 서류 더미 속에서 꼬투리를 찾아내고, 허점을 메우며, 법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일. 그리고 그는 그런 일에 꽤 능숙했다. 지루하고 단순한 일상. 그는 오늘도 별다른 것 없는 하루를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군 내부 인사들의 징계 사항을 검토하던 그의 손에 한 장의 문서가 걸렸다. 그것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단 폰 살바토르]
 
블랙은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복무 기록일 뿐이었다. 그는 그것을 대충 읽어 넘길 심산이었다. 딱히 살바토르 소장이 어디 가서 사고를 치고 다녔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블랙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관의 퇴각 지시에 항명하고 사지에 뛰어든다든가 하는⋯⋯ 그는 너무나도 쉽게 그런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살바토르 소장 그 인간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상상만 해도 짜증 나⋯⋯.'
 
블랙이 인상을 팍 구기자 탕비실에서 돌아오던 한 위관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내가 너무 시끄러웠나?'라는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며 제자리로 살금살금 돌아갔다. 블랙은 그가 무얼 어쩌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블랙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에단의 복무기록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꼼꼼하게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다⋯⋯ 그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허."
 
블랙은 볼펜으로 서류에 선을 죽 그었다. 펜촉이 지나간 자리 위에 나열된 글자는, 입대 전의 에단이 쌓아 둔 화려한 이력이었다. 흉악범을 체포하고, 영지를 지키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다 좋았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말이 없네.'
 
정식 심사.
 
'정식 심사도 없이 장교로 임관했는데, 그 후로는 고속 승진이라⋯⋯.'
 
블랙의 그 생각을 반박이라도 하듯 이력 최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 녹스 왕국 왕립 제2기사단 기사단장 재임 이력 확인
- 녹스 기사단 활동이 군 복무로 인정됨
 
'⋯⋯웃기고 있네.'
 
해군에서는 기사단 복무 경력을 공식적인 군 경험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심사를 거쳐야 하며, 일정한 절차를 따라 승인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꽤나 까다롭고, 지난하며, 복잡하다.
 
그런데, 살바토르 소장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장교가 되었다.
 
블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귀족이 군에서 쉽게 출세하는 건 흔한 일이다. 오히려, 영지 가진 대귀족쯤 되는 인간이 블랙처럼 정공법으로 헤딩하는 게 기행이다. 하지만 블랙은 막연하게, 에단도 자기처럼 귀족이라는 이유로 취할 수 있는 특혜와 편법을 포기하고 본인의 능력과 실력으로 자리를 쟁취했을 것이라고 멋대로 오해했다. 우스운 착각을 한 것이다.
 
블랙 입장에서, 에단 폰 살바토르는 대하기 상당히 껄끄러운 인간이었다. 방긋 웃으며 다가와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블랙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선하고 정의로운 것을 먼저 택하는 습관, 바른길을 나아가는 자 특유의 올곧은 당당함, 자신을 향한 모든 악의를 이해하고 넘어갈 듯한 포용. 그런 것을 가진⋯⋯ 썩 괜찮은 인간이라서.
 
그런데 그 인간이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니, 블랙은 한껏 기만당한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인간성이 위선인 것이 되겠고, 몰랐다면 처지가 우스운 것이 되겠다.
 
블랙은 천천히 서류를 덮었다. 뭐, 기분이 나쁘긴 해도 이걸로 당장에 시비를 걸거나 따질 생각은 없었다. 출신 배경이 어떻든 군에 들어와서 제 역할을 다하면 그만인 법이다. 애당초 에단이 어떤 방식으로 입대하고 승진했는지는 블랙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냥 에단에게서 관심을 끄고 싶었다. 에단이 자신 앞에서 친절을 가장하건 말건.
 
그러나,
불편한 감정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블랙은 법무실을 박차고 나와 제 개인 사무실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가고 있었다. 약기운이 거의 다 떨어져서는 금단증상으로 잔뜩 앓다가, 참다 참다 더는 못 참을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결국 다시 멍청한 선택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상태가 진정되고 나면 또 할 일이 산더미이기에, 어떻게든 컨디션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필 심신이 박살 났을 때 에단과 마주친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블루 소령! 좋은 하루⋯⋯ 잠깐, 자네 괜찮은가? 법무실까지 갈 수 있겠어? 아니, 지금은 의무실이 더 낫겠군. 부축이라도──"
 
또 친절한 태도로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에단을 마주한 블랙은 질린 낯이 되었다. 안 그래도 속 쓰린데 속이 뒤집힐 것 같이 됐잖아. 블랙은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불퉁하게 내뱉었다.
 
"반차 냈습니다. 법무실 말고⋯⋯ 내 사무실 가서 영지 업무 봐야 합니다."
 
"아니, 자네는 지금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속 편한 소리를. 블랙은 이번에도 호의를 짜증으로 받아쳤다.
 
"영주가 뻗어 있으면 나라 꼴이 잘 돌아가겠습니다."
 
"영주라는 건 힘든 일이로군⋯⋯."
 
"녹스에는 영주 없는 줄 아십니까. 소장님 미랩니다."
 
블랙은 그냥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 수도 있었다. 괜히 피곤해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공연히 불필요한 말을 덧붙인 것은 두통 때문이었을까, 심사가 뒤틀린 탓이었을까. 블랙의 입에서는 결국 무심하게 뾰족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여기 앉은 것도 집안 때문 아닙니까. 때 되면 돌아가셔야죠."
 
에단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가?"
 
블랙은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터뜨렸고.
 
"정식 심사 없이 장교 계급 받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내가?"
 
"그렇던데요."
 
──그렇던데요. 그것은 조금 전에 던진 말이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이미 확인된 사실이라는 선고였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쌍방의 침묵.
 
에단이 곧장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블랙을 더욱 신경질 나게 만들었다. 에단은 블랙을 그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블랙은 한숨을 뱉었다. 내가 이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
 
"절차 없이 연줄로 올라오셨습니다."
 
블랙은 팔짱을 끼고, 짧게 덧붙였다.
 
"몰랐습니까."
 
에단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웃음이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었나 보군."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조금 흐려져 있었다. 블랙은 어이없다는 듯 조소했다.
 
"이제 와서 그게 켕깁니까. 애초에 깨끗한 군대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블랙은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이없고 짜증 나긴 해도, 몰랐다는 사람을 몰아세우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블랙은 등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터진다.
 
"부축은⋯⋯!"
 
"필요 없습니다."
 
보아하니 제법 충격받은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도 남 챙길 여유는 있는 모양이지.
 
블랙은 휘청이려는 몸을 곧게 세우고 사무실로 향했다. 에단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블랙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이제 와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이 대화는 블랙의 예상보다 큰 파장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블랙 소령이 에단 소장님한테 또 뭐라고 했다면서?"
"낙하산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던데."
"아실릭 소령은 원래 소장님 싫어하잖아."
"아니지, 그 소령은 모든 인간을 싫어해."
"소장님 놀랐겠다⋯⋯."
"근데⋯⋯ 소령도 법무실장이고, 없는 말 지어낼 사람은 아니지 않아?"
"그럼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건수 잡았다고 사람 하나 쫓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블랙은 묵묵히 복도를 지나며, 해병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흘려들었다. 딱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흐름이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손에 쥔 것이 많은 만큼, 그의 말이 이런 식으로 필요 이상 와전되어 퍼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그는 며칠 후, 본부에서 떠도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단 소장님, 사임 고민 중이시라더라."
 
블랙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진짜야?"
"응, 본부 쪽에서도 얘기가 좀 나오는 모양이야. 본인도 꽤 고민하는 것 같고⋯⋯."
 
그 대화를 들은 블랙의 솔직한 감상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자면, '멍청하다' 였다. 예상보다도 훨씬 더 멍청한 선택. 낙하산으로 들어왔으면 들어온 대로 그 위치에서 잘하면 되는 일이다. 블랙은 에단을 싫어했지만, 그가 강하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제 행적에 때 좀 묻었다고 모든 걸 팽개치고 떠나버리겠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결론이었다.

 

 

 

 


 

 

 

 
해가 기울어가는 저녁. 블랙은 개인 사무실의 의자에 기대앉아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문서가 몇 장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도장이 놓여 있었다. 블랙은 손에 쥔 펜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오늘도 그저 그런 하루였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려던 참이었다.
 
그렇게 슬슬 업무를 마치려던 순간, 블랙은 문밖에서 웬 거슬리는 인기척 덩어리들을 감지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가만있어 보니, 이내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 없는 인간인가 하고 눈만 굴려 문틈을 바라보자⋯⋯
 
"블랙 소령님⋯⋯?"
 
작게 떨리는 미약한 목소리가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열린 문 너머에는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그들은 작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서로의 옷자락을 잡은 채 망설이고 있었다. 눈에는 확연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뭐야."
 
블랙이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묻자, 아이들은 움찔했다. 의아한 시선이 내리꽃힌다. 그러던 와중, 가장 앞에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양손에 꼭 쥔 종이가 블랙의 눈에 들어왔다. 구겨지고, 손때가 묻어 있는 낡은 공책의 낱장. 그리고, 앞선 아이가 두 눈을 꾹 감고 외쳤다.
 
"에단 소장님을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블랙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눈앞의 작은 손. 손에 꼭 쥔, 구겨진 종이. 그는 아이가 제게 고개를 숙이며 내민 종이를 바라보았다.
 
[탄원서]
 
'무슨⋯⋯.'
 
당연히,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엉성하게 적힌, 법적 효력이라고는 전혀 발휘할 수 없는 난잡한 잉크 자국일 뿐이었다. 다만──
 
[에단 소장님은 착한 사람이에요]
[저랑 엄마를 나쁜 해적들한테서 구해줬어요]
[소장님 피 많이 나고 많이 다쳤는데도 집 부서졌는데 저 꺼내줬어요]
[소장님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절박했다.
 
블랙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세간의 인식이 어떤지 꽤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가맹국의 백작. 대도시의 영주. 함대 지휘권을 지닌 장교. 그리고,
 
사람 하나 증발시키는 건 일도 아닌 능란한 법률가에, 더러운 것과 신경에 거슬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냉혈한.
 
평범하게 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소탈하게 제 삶 꾸려가는 시민 입장에선, 한마디로 절대 엮이지 말아야 할 무서운 인간이 되시겠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뭘 믿고 수틀리면 사람 날리는 인간 앞에⋯⋯ 여긴 그 소장도 없는데⋯⋯.'
 
당혹을 가라앉힌 블랙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제 앞에서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가능성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과연 이 아이들은 믿을만한가?
 
상식적으로 목숨 아까운 줄 알면 이딴 짓 안 하지.
이런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탄원서를 써.
뒤에서 누가 시킨 것 같은데. 연줄 제공자 측의 간계인가?
아이들을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해서, 내가 소장 일에서 손 떼게 만들려고.
뭐 협박이라도 했나⋯⋯.
 
그의 머릿속에서 논리적인 결론이 도출될 무렵, 가장 앞에서 조심스레 종이를 내밀던 아이가 작은 주먹을 꽉 쥐고,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소, 소령님도⋯⋯! 같이 저 구해주셨잖아요⋯⋯."
 
"⋯⋯?"
 
"소령님 나쁜 사람 아니죠, 그쵸⋯⋯?"
 
블랙은 시선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본 기억이 있었다. 이전에 살바토르 소장과 함께 샤봉디에서 구조한 소년이었다.
 
'뭘 믿고──'
 
⋯⋯이 씨발.
믿은 게 나구나.
이런 빌어처먹을.
 
블랙이 애꿎은 살바토르 가문을 의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야── 아실릭이었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마 애들 목에 폭탄도 둘러서 보냈을 것이다. 기실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것이 귀족이란 족속들이다. 그 썩어빠진 인간성은 비단 아실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블랙은 새삼 저가 속한 곳이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 상기했다.
 
⋯⋯여하튼, 아이들은 블랙이 에단을 내쫓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문이 그런 식으로 와전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리라. 블랙은 조용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가장 작은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윽⋯⋯ 흐윽⋯⋯."
"⋯⋯! 바보야! 쉿, 조용히 해!"
"힉⋯⋯."
 
"⋯⋯."
 
진짜 뭐 하는데.
무서우면 그냥 도망갈 것이지 왜 그렇게 버티고 서 있나⋯⋯.
 
블랙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 거기 두고 가."
 
그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허겁지겁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전부 도망치듯 사라지나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나간 한 아이가 문을 도로 열고 몸을 빠끔 내밀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내 다시 후다닥 달아났다.
 
열린 문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블랙은 조용히 책상 위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그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힘이 들어간 손에 의해 종이 역시 우그러졌다.

 

 

 

 


 

 

 

 

블랙은 책상 위에 놓인 탄원서를 내려다보았다.
 
하, 이게 뭐야.
 
종이는 볼품없었다. 낡은 공책에서 뜯어낸 얇은 낱장, 흔들리는 필체로 새겨진 엉망인 문장들.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줄글이었다.
 
그리고 애당초 에단이 사임을 고민하든 말든, 그것이 블랙과 무슨 상관인가. 제 발로 나가겠다는데.
 
⋯.
 
⋯⋯.
 
더럽게 신경 쓰였다.
 
"아, 진짜 ──!!"
 
제 성질을 못 이긴 블랙이 언성을 높이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자, 쾅 하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철필대가 박살 나며 책상에 패인 자국이 생겼다.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너무 불쾌했다. 열받고, 짜증 나고⋯⋯.
 
결국, 그는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냥⋯⋯ 짜증 나는 문제를 빨리 정리해 버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복무 기록을 인정받으려면,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단순히 서류를 조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법무관이었다. 그가 해야 할 것은── 이 문제를 없앨 수 있는, 합법적인 선 내의 가장 적합한 루트를 찾는 것이다.
 
블랙은 밤까지 책상에 앉아 국제법 조항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살바토르 소장이 녹스의 기사단에서 근무했던 기간을 해군 복무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한가?
국제법에서 관련 조항을 찾을 수 있는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된다.'
 
그는 꼼꼼하게 서류를 정리했다. 이것은 에단이 원래부터 받을 수 있었던 정당한 평가였다. 위조도, 편법도 아니다. 이대로 가면 에단이 법적으로도 완전히 떳떳하게 남을 수 있는 공식 절차를 이행 가능하다.
 
그가 한 일은, 에단의 기사단 복무 경력을 군법 조항에 따라 인정받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서류를 훑어본 후, 펜을 들어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걸 상부에 던져주고 끝내면 된다. 지들이 벌여 놓은 일 수습해 주겠다는데 공연히 태클 걸진 않겠지⋯⋯.

 

 
 

 


 
 

 

 
며칠 후.
 
쾅!
 
자리에 앉아 있던 에단은 느닷없이 제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블랙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실릭 소령?"
 
그러나, 블랙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손에 든 두툼한 서류 다발을 에단의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콱 팽개칠 뿐이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 낙하산 아닙니다."
 
에단은 영문도 모르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어리둥절한 그가 그것을 펼치자, 첫 장엔 '국제법상 복무 인정 심의 통과 기록'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삽입되어 있었다.
 
그는 점점 더 멍한 낯이 되어서 서류를 팔락거리며 넘겼고, 블랙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특별 복무 경력 심사 보고서] [국제법 기준 준수 복무 경력 심사 승인서] [세계정부 가맹국 군사훈련 이수 확인서] [세계정부 가맹국 군사 경력 공식 인증서] [군사 복무 이력 검토 및 최종 승인 문서] [국제 군사 경력 심사 확인서] [특별 군사 공적 인정 및 심사 최종 결정문] [군사 복무 기간 정식 인정 확인서]
 
에단이 말을 잇지 못하며 서류와 블랙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 블랙은 몸을 돌려 터벅터벅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에단은 빠르게 종이를 팔락팔락 넘겼다.
 
[국제법상 군 복무 심의 및 공식 승인 문서] [해군본부 장교 선발위원회 심사 승인서] [해군본부 장교 선발 최종 심사 확인서] [장교 임관 자격 심사 승인서] [정식 임관 자격 확인 문서] [해군 장교 복무 기간 조정 및 특진 심사 승인서] [장교 진급 심사 최종 확인서] [해군본부 장교 특진 승인서]
 
그리고 마지막 장 뒤에는, 거친 면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종이가 덧대어져 있었다. [에단 소장님은 착한 사람이에요]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간절한 호소문이.
 
"불청객은 꺼질 테니 일 마저 보시죠."
 
블랙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문을 쾅 닫고 에단의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얼떨떨하게 서류를 재차 펄럭이던 에단은, 문서의 하단에 자리한 익숙한 서명을 드디어 눈치챌 수 있었다.
 
"자──"
 
심사 군법무관: 아실릭 데미안 블랙 소령
 
"──잠깐 기다리게! 블루 소령!!"
 

 

 

 

 
 
 
 
블랙은 기분이 더러웠다. 선심 써서 호의를 베풀고 좋은 결과까지 보았는데도 심사가 이리 뒤틀린 이유는⋯⋯ 그냥 그가 성질이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 좋은 일 해 준 걸로 곱게 기분 좋아질 만큼 따듯한 마음씨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그는 일이 해결되었음에도 상쾌함은커녕 만족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면서도, 시간과 체력을 허비했다는 느낌에 비위가 상한 것이다. 적잖이 꼬인 인간이 아닐 수 없다.
 
"하⋯⋯ 안 그래도 바빠 뒤지겠는데 ■뺑이를 씨⋯⋯."
 
그러다 그때,
 
"──블루 소령!!"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에단이 블랙을 붙잡으려 했다.
 
"──!!"
 
그리고,
블랙은 반사적으로 튀었다.
 
도피 생활이 길었던 탓에,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다리가 바로 움직인 것이다.

 

 
 
 
 

 
 
 

 

복도는 쓸데없이 길고 넓었다. 전시도 아닌데 느닷없이, 낮은 구두 굽이 차가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얼결에 시작된 추격전은 둘의 예상보다 지지부진 늘어졌다.
 
블랙이 앞서 달리고, 뒤에서 에단이 그것을 쫓았는데⋯⋯ 지나치는 해병들이 은근히 에단을 응원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니 블랙은 더 성질이 긁히는 것이다.
 
나도 니들 상관이야!
 
블랙은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평소 행실 탓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에단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블랙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달리기에 집중했다. 
 
'대체 왜 쫓아오는 거냐고! 일 다 끝났잖아!'
 
멋대로 그리 결론지은 블랙은 상대도 그 결론을 선선히 응수하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단은 블랙이 바라는 것만큼 포기가 빠른 사람이 아니었고, 블랙은 그를 포기시킬 만큼 오래 달리기에 적합한 체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기사단장이었던 장성급 장교였다. 한쪽은 법무실에서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것이 주 업무였고, 한쪽은 현역으로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초반에는 그래, 블랙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썩어도 준치, 영관도 장교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윽고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힘이 점점 풀리고, 속이 쓰려왔다. 그는 특히나 지구전에 약했기에⋯⋯. 그렇게, 당연한 수순처럼 블랙과 에단의 거리는 천천히 좁혀졌다. 
 
'이런 ㅆ──.'
 
그가 속으로 욕설을 삼키는 사이, 결국⋯⋯.
 
"자, 잠깐 타임." 
 
두 인영은 거의 겹쳐졌고, 블랙은 복도 벽을 짚고 멈춰 섰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하, 무슨 체력이⋯⋯ 하아⋯⋯." 
 
식은땀으로 습해진 목덜미에 잘은 머리카락이 눌어붙었고, 가슴께도 좀 쓰린 것 같았다.
 
'아 ■■ 진짜 꼴사나워 ■■⋯⋯.'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단이었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눈빛.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블랙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
 
"괜찮나? 속은 어떤가? 어지럽지는 않은가? 앉아서 좀 쉬게⋯⋯."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 이렇게⋯⋯. 블랙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왜 쫓아온 겁니까. 안 그래도 쓸데없는 거에 시간 쓰느라 일 밀렸습니다." 
 
그는 짜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에단은 잠시 블랙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슬며시 내밀었다.
 
"그── 설명을 부탁하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해가 잘, 갑자기, 대체 왜?" 
 
그리고, 
 
"이거, 자네가 해준 건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물음에 블랙의 시선이 잠시 서류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시선을 거두고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으며⋯⋯ 이내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그의 말투는 자못 불손했다. 상관을 향한 태도라고 하기엔 썩 삐딱했다. 그러나 에단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담담한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정말 고맙네. 난 자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 
 
"싫어합니다." 
 
에단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블랙이 단칼에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이 짜증 난다는 양 한껏 가라앉은 눈을 한 채로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 
 
"괜히 착각하지 마시죠. 난 소장님이 아니라, 소장님이 구한 사람들 때문에 움직인 겁니다."
 
그의 말은 건조했다. 에단은 입을 다물었다. 블랙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전보다도 더 피곤한 얼굴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더했다. 
 
"자격 있는 사람이 계속 남는 게 뭐가 문젭니까. 떳떳하게 일하고, 그냥⋯⋯ 원래 하던 것처럼 사람들 구하면 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에단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감동한 사람처럼⋯⋯ 맑게 빛나는 눈으로 블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을 마주한 블랙은 그 순간⋯⋯ 진심으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 걍 다 때려치워⋯⋯!!'